새 한 마리 날아다니지 않는 바닷가에서 나와 아이는 벤치에 앉아있었다. 언제 어디서 만났고 왜 지금 같이 있는지 우린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눈앞에서 붉고 커다란 태양이 수평선 아래로 가라앉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와 아이는 그 적요한 풍경을 한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아저씨.”
“응.”
“저 석양 너무 예쁘지 않나요? 내일 또 보겠지만 그래도 사라진다는 건 슬픈 일이에요.”
아이의 목소리는 보라색이었다. 명랑한 빨간색도 아닌, 조숙한 파란색도 아닌, 꿈속에서나 읊조릴 법한 보랏빛 목소리였다. 나와 아이의 시선은 저물어 가는 태양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러게. 사라진다는 건 슬픈 일이지. 전에도 그런 걸 느낀 적이 있었나 보네.”
“네, 특히 라디오 끝날 때 나오는 마지막 멘트는 들을 때마다 슬퍼요. 내일 또 만난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냥 울적해져요.”
“그럼 라디오 끝나고 바로 잠에 드니? 난 요즘 그래. 우울하면 하루를 억지로 끝내버려.”
“흠, 저는 다른 채널로 돌리거나 아니면 CD를 틀어요. 밤에 듣는 음악은 또다른 느낌이 들거든요. 아, 맞다. 전에 엄마아빠랑 CD 파는 곳에 갔었어요. 거기서 산 앨범이 너무 좋아서 매일 밤마다 들어요.”
“무슨 앨범인데?”
“빌 에반스라고 재즈 피아노 치는 사람이에요. 저도 나중에 꼭 재즈 연주자가 될 거에요.”
“그래. 다만 너무 심취하진 말렴. 재즈 말고 너가 재즈에서 느끼는 감정에.”
“수수께끼 같은 말이네요.”
“잘 다루기만 한다면 참 예쁜 감정이야. 밤하늘에 떠있는 별처럼 반짝반짝 빛나지. 하지만 어느 순간 장애물이 될지도 몰라.”
“이해가 안돼요. 그 아름다운 것이 어떻게 장애물이 된다는 거죠?”
“나도 잘 모르겠어. 근데 지금 날 보면 그런 생각이 들어.”
“왜요? 아저씨가 어떤 사람인데요?”
“나는…… 나도 어렸을 때 빌 에반스를 좋아했던 사람이야. 응, 맞아. 난 어렸을 때 빌 에반스를 들었던 사람이야.”
“그럼 저도 커서 아저씨 같은 사람이 되겠네요.”
“그럴지도. 아마 그러겠지. 아니, 거의 그럴 거야.”
“아저씨는 아저씨가 좋아요?”
육지까지 다다른 파도는 모래의 온기를 느낄 새도 없이 순식간에 부서졌다. 철썩거리는 소리가 한 올 한 올 엮이고 짜여 이불마냥 우리를 폭 감쌌다.
아이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내심 원대한 대답을 기대하는 눈치였다. 그의 기분을 배려해서라도 대충 얼버무려 넘어갈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부끄럽게도 나는, 그러지 못했다.
“딱히. 그래도 빌 에반스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게 좋았어. 남들보다 빨리 감정의 폭을 넓혔다는 생각이 들었지. 그걸 내 방식대로 표현해보기도 했고. 비록 조잡하긴 했지만.”
“그러면 아저씨는 멋진 사람이네요.”
“하지만 그런 감정을 느끼는 능력은 결국엔 아무 쓸모도 없더라고. 오히려 약점이야, 약점. 너무나 많은 방법으로 내 발목을 잡았어. 사람들이 변하지 않는 행복을 향해 앞으로 나아갈 때, 나는 그 쓸쓸하고 우울한 감정으로 자꾸 되돌아갔던 거야. 나도 멋진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말이지.”
“아저씨가 말하는 멋진 사람이 뭐에요?”
“성공한 사람이라고나 할까. 꿈을 향해 돌진할 수 있는 사람. 어떠한 감정의 방해도 없이. 물론 그 꿈에도 조건이 있어. 세상이, 자본이, 대중이 인정하는 꿈이어야 해. 사람들에게 강하고 흐트러짐 없는 모습만 보여줄 수 있는 그런 일들 있잖아. 본인 스스로가 대단하다고 믿는 삶, 그게 멋진 사람의 인생이겠지.”
“아저씨는 그럴 수 없는 거에요?”
“난 실패했어. 오래 전부터. 내 앞에도 남들과 똑같이 성공의 길이 있었어. 집중만 제대로 했더라면 그 길을 걸어갔을 거야. 그런데 마음 한 켠에 자리잡은 그 감정, 그 쓸쓸하고 우울한 감정이 불어나고 불어나서 결국 회의감이 되더라. 나는 그 길을 믿을 수 없었어. 어딘가 이상하고 잘못된 것 같았지. 그 길을 따라가는 확신에 찬 내 모습이 우스워 보였던 거야.”
“그 길을 안 가면 큰일 나나요?”
“큰일이 난다기보단 상처를 줄 수 있어. 아까 말한 세상, 자본, 대중에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도 속해있거든. 그들도 내가 멋진 사람이 되길 바랬을 거야. 하지만 난 그들이 원하는 꿈과 행복에 의심을 품고 말았어. 길을 완주하기는커녕 시작도 못했지.”
“……”
“날 아껴준 사람들인데. 날 사랑해준 사람들인데. 그들을 실망시켰어야 했을만큼 그 쓸쓸하고 우울한 감정은 나에게 중요한 것이었을까. 오히려 장애물일지도 몰라. 그걸 극복하지 못하고 제자리걸음만 하는 나의 문제일지도. 물론 그 감정을 지니면서 열심히 배우고 표현하는 삶을 살고 있지만, 모르겠어. 과연 난 얼마나 성장하고 있는 건지. 얼마나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건지. 무언가를 잃어버린 기분이 들어. 가족, 친구들, 갈대밭, 바다. 그래, 바다. 지금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이 바다를 가장 사랑했고, 이 바다에서 가장 멀리 떠나와 버렸어. 그 쓸쓸하고 우울한 감정을 떨쳐냈더라면, 성공의 길을 의심 없이 걸었더라면, 이 바다에 좀더 오래 머물 수 있었을까.”
아이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우린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바람이 스쳐간 자리에는 공허한 소금내음만이 남아있었다.
하늘은 점점 붉게 물들어갔다. 아이는 모래 위에 원을 그리고 지우며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싶더니,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 위로 황금빛 석양이 부스러졌다.
“아저씨 말대로 그 길을 걸어갔더라면 재미있는 일이 많았을 것 같아요. 하지만 아저씨가 아직도 그 감정을 갖고 있기 때문에 지금 저랑 얘기할 수 있는 걸지도 몰라요. 이렇게 같이 저무는 태양도 보고요.”
“그런가. 다행이네. 내가 너한테만은 부끄러운 사람이 아니길 바랬는데.”
“기운이 없고 조금 우울해 보이지만 전 아저씨가 낯설지 않은 사람이라서 좋아요.”
“고마워. 너는 꼭 나보다 멋진 사람이 되렴. 더 행복하고, 사람들에게 더 많은 행복을 줄 수 있는 사람.”
아이는 알겠다는 듯이 생긋 웃었다. 그러고는 빛을 쏟아내는 태양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아저씨, 저 석양 좀 봐요! 와, 이제 거의 다 내려갔어요! 정말 아주 조금 남았어요! 아저씨, 작별 인사해요. 저 태양에게. 내일 다시 보겠지만, 그래도 오늘 잘 가라고. 다음에 또 보자고 인사해요.”
나는 아이를 따라 사그라지는 태양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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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완전히 지면서 바다는 푸르스름한 어둠 속에 흐릿해졌다. 시간이 멈춘 듯 정적이 흐르는 바다엔 포말만이 자잘하게 일었다. 나는 헛헛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돌렸다. 아이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바람이 불었다가 그쳤다. 나는 달빛이 하얗게 깔린 모래사장을 홀로 걸어 나왔다.
그렇게 나는 어린 시절의 나와 헤어졌다.